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와 민법 제758조 | 법률사무소 솔라리스
2019년 1월, 한 제조기업의 울산 사업장에 설치된 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 화재가 발생해 설비가 전소됐습니다. 고객사가 ESS 공급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은 약 41억 원, 항소심은 약 10억 원의 배상을 명했지만, 대법원은 2025년 9월 원심을 파기했고 파기환송심은 2026년 1월 고객사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습니다(대법원 2025. 9. 4. 선고 2025다212812, 212813 판결, 서울고등법원 2026. 1. 22. 선고 2025나209517 판결).
화재가 배터리에서 발생한 사실 자체는 다투어지지 않았는데도 고객사는 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채무불이행 책임에서는 공급사의 과실이 증명되지 않았고, 공작물책임에서는 청구한 손해가 배상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됐기 때문입니다.
ESS 화재를 둘러싼 분쟁이 다수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판결은 유사 사건의 방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계약 구조 : ESS 설비 공급이 아니라 "전기요금 절감 서비스" 계약
이 사건에서 공급사는 2017년 11월 고객사의 4개 공장에 자기 비용과 책임으로 ESS 설비를 설치하고 이를 활용한 전기요금 절감 서비스를 15년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ESS 설비 소유권은 공급사에게 남고, 고객사는 절감된 전기요금의 80%를 서비스 이용료로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설비를 파는 계약이 아니라, 설비를 수단으로 삼아 "절감"이라는 결과를 파는 용역계약입니다.
2019년 1월 21일, 울산공장 ESS 설비 2층 배터리 랙에서 화재가 발생해 설비가 전소됐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배터리 셀 내부의 절연파괴로 발화한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어떤 원인으로 절연파괴가 발생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고, 경찰도 범죄혐의점이 없다며 내사를 종결했습니다. 발화 지점은 특정됐으나 근본 원인은 불명인, ESS 화재 사건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였습니다.
고객사는 계약을 일부 해지한 뒤, 공급사에게 주위적으로는 민법 제390조의 채무불이행 책임을, 예비적으로는 민법 제758조 제1항의 공작물책임을 물었습니다.

법원의 채무불이행 책임 불인정
주위적 청구에 대한 판단은 1심부터 환송심까지 일관됐습니다. 화재가 ESS 배터리 내부에서 발화했다는 사정만으로는 공급사가 설치·유지보수에 관한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급사가 전기사업법상 사용전검사 등 관련 법령을 준수해 설비를 설치했고, 화재 이전의 이상 징후에 대해 일정한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랙 퓨즈나 소화장치 설치는 법령상 의무도 정부의 안전강화 대책도 아니었다는 점이 근거가 됐습니다. 배상을 구하는 쪽이 공급사의 구체적인 주의의무와 그 위반 사실을 주장·증명해야 하는데, 원인 불명의 배터리 화재 사건에서 이에 대한 증명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고객사는 배터리 제조사의 과실을 공급사의 과실로 귀속시키는 주장도 했습니다. 민법 제391조는 채무자가 타인을 사용하여 이행하는 경우 그 피용자의 고의·과실을 채무자의 고의·과실로 본다고 규정하므로, 배터리 제조사가 공급사의 이행보조자라면 제조상 과실이 곧 공급사의 과실이 됩니다. 그러나 환송심은 위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이 계약의 급부는 설비 설치가 아니라 전기요금 절감 서비스의 제공이고, 제조사가 배터리를 만들어 납품한 행위는 공급사의 채무 이행행위에 가담한 활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채무 이행행위에 속한다고 볼 수 없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행보조자가 아니라는 대법원 2013. 8. 23. 선고 2011다2142 판결의 법리가 적용됐습니다.
공작물책임에 대한 법원의 판단
공작물 책임과 관련된 예비적 청구에 대해서는 심급별로 판단이 갈렸습니다. 다만 ESS 설비에 하자가 있었다는 판단 자체는 모든 심급에서 유지됐습니다. 발화 지점이 배터리로 특정되고 달리 외부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설비가 용도에 따라 통상 갖추어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 즉 설치·보존상의 하자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공급사는 설비의 점유자 겸 소유자였으므로 책임 주체성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민법 제758조(공작물등의 점유자, 소유자의 책임) ① 공작물의 설치 또는 보존의 하자로 인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공작물점유자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점유자가 손해의 방지에 필요한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소유자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쟁점은 배상의 대상이었습니다. 고객사가 구한 손해는 설비 소실로 인한 물적 피해가 아니라, 화재로 절감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게 되어 상실한 경제적 이익, 즉 이행이익이었습니다. 심급별 판단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심급 | 채무불이행 | 공작물책임 하자 | 이행이익 배상 | 인용액 |
1심(서울중앙지법 2021가합511015) | 부정 | 인정 | 잔여 계약기간 기준 산정, 책임 50% 제한 | 약 41.8억 원 |
항소심(서울고법 2024나2011656) | 부정 | 인정 | 서비스 재개 소요기간 1년분으로 한정, 책임 70% 제한 | 약 10.3억 원 |
대법원(2025다212812) | 상고이유 | 인정 전제 | 공작물책임의 배상범위에 불포함 | 파기환송 |
환송심(서울고법 2025나209517) | 부정 | 인정 | 배상 불가 | 전부 기각 |
1심은 민법 제763조가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민법 제393조를 준용한다는 점 등을 들어 이행이익도 공작물책임의 배상범위에 들어간다고 보고, 감정 결과에 따라 산정된 이행이익 약 83.6억 원에 책임제한 50%를 적용했습니다.
항소심은 배상 자체는 긍정하되, 절감 서비스는 다른 ESS 사업자로부터도 제공받을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용역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화재 원인 규명, 설비 철거, 제3 사업자와의 협상, 재설치까지 합리적으로 소요되는 기간을 약 1년으로 산정하고 그 기간의 이행이익만을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로 인정한 뒤 책임을 70%로 제한한 것입니다.

대법원의 판단 : 하자와 관련한 위험이 현실화된 손해인지 여부
대법원은 손해의 액수나 기간이 아니라, 그 손해가 공작물책임으로 배상될 성질의 것인지부터 다시 검토하였습니다. 공작물책임의 입법 취지는 위험한 물건을 지배하는 자에게 위험 방지 주의를 요구하고 그 위험이 현실화되어 손해가 발생하면 배상책임을 지우는 데 있으므로, 공작물의 하자로 어떤 손해가 발생했더라도 그것이 하자와 관련한 위험이 현실화되어 발생한 손해가 아니라면 민법 제758조 제1항의 배상 대상이 아니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2010. 2. 11. 선고 2008다61615 판결, 대법원 2018. 7. 12. 선고 2015다68348 판결 참조). 즉, 절감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게 된 손해는 계약이 이행되지 못함에 따른 것이지, 공작물인 ESS 설비의 하자와 관련한 위험이 현실화되어 발생한 손해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은 리튬이온 배터리의 위험이 현실화된 손해란 화재·폭발로 인한 인명 피해나 인접 시설의 소손 같은 것이고, 서비스 중단으로 인한 계약상 기대이익의 상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그 결과 고객사의 청구는 계약책임에서는 과실이 증명되지 않아 공작물책임에서는 손해가 배상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전부 기각됐습니다.
실무 체크포인트 : 계약 단계에서의 배상 구조 설계 필요성
이 판결에 따르면, 원인 불명의 배터리 화재가 발생한 뒤 소송으로 이행이익을 회수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수요기업으로서는 계약 체결 단계에서 손해의 전보 구조를 정해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계약에도 손해배상액 예정 조항이 있었지만 "공급사의 귀책사유로 인해 계약이 해지되는 경우"를 요건으로 삼고 있어, 귀책사유가 증명되지 않자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설비 화재·소손 등 객관적 사고 발생 자체를 요건으로 하는 무과실 보상 특약, 배터리 등 주요 부품 제조사의 하자를 공급사의 책임범위로 명시하는 조항, 영업중단손해를 담보하는 보험 부보 의무와 수익자 지정 조항이 검토 대상입니다. 배터리 제조사에 대한 제조물책임 청구를 별도로 검토할 필요도 있습니다.
공급사와 그 보험사에게 이 판결은 유력한 방어 근거가 됩니다. 다만 하자 자체는 인정되는 구조이므로 인명 피해나 인접 설비 연소 같은 전형적 위험이 현실화된 손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작물책임을 부담한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계약서 문구를 정하는 단계에서 이 판결의 배상범위 법리를 반영하는 것이 분쟁 비용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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